비과세 계좌 안에서 초부유층이 수천억 원대 차익을 아예 세금 없이 챙긴다는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지?"라는 질문부터 떠올랐습니다. 제도가 허술해서가 아니라, '공정 시장 가치'라는 계산 하나가 자의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틈새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연금과 ISA를 몇 년째 굴리고 있는 입장에서, 같은 비과세 구조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는지 그 메커니즘을 파고들어 봤습니다.

합법과 편법 사이 — FMV라는 열쇠
미국의 개인퇴직계좌(IRA)는 한국의 개인형 퇴직연금(IRP)이나 ISA 계좌와 비슷한 성격입니다. 근로자가 은퇴 후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도록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장기 저축·투자 계좌인데, 납입금이나 투자 수익에 대한 과세를 미루거나 면제해 주는 '비과세 이연' 구조가 복리 효과를 극대화시킵니다.
최근 화제가 됐던 로블록스 창업자 그레고리 바주키(상장 전 편입한 지분으로 IRA 잔액 최소 6,800만 달러), 엔비디아 이사 텐치 콕스(IRA 내 자산 20억 달러 이상, 세금 절감 약 4,000만 달러) 사례, 그리고 IRA 잔액 2,500만 달러 이상 보유자가 1,000명을 넘어섰다는 미 의회 합동조세위원회 통계(출처: Joint Committee on Taxation)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제가 이번에 진짜 파고들고 싶었던 건 이 숫자들 자체보다, 이런 결과가 가능하게 만드는 '설계상의 열쇠'가 정확히 무엇이냐는 점이었습니다.
그 열쇠는 공정 시장 가치(FMV, Fair Market Value)입니다. FMV란 거래 쌍방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자유롭게 거래할 때 형성되는 자산의 적정 가격을 뜻합니다. 상장 주식이나 ETF는 시장에서 실시간으로 가격이 매겨지니 FMV 산정에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비상장 스타트업 주식은 다릅니다. 초기 단계 기업의 지분 가치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매기느냐에 따라 IRA에 편입되는 '취득가'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취득가가 낮게 잡힐수록, 이후 상장해서 오른 차익 전체가 비과세로 인정받는 폭도 커집니다.
여기서 조세 회피(Tax Avoidance)와 탈세(Tax Evasion)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세 회피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세금을 줄이는 합법적 행위이고, 탈세는 법을 위반하는 불법 행위입니다. 비상장 주식을 낮은 FMV로 IRA에 편입하는 전략은 기술적으로 명백히 전자에 속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제도를 설계할 때 상정했던 '근로자의 노후 자금 마련'이라는 취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ISA에서 납입 한도를 따지며 아끼는 세금과, 이 구조에서 발생하는 절세 규모는 같은 제도 안에 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차원이 다릅니다.
차세대 절세 설계 — 트럼프 계좌와 로스 전환
FMV를 활용한 절세가 '현재의 허점'이라면, 최근 주목받는 '트럼프 계좌'는 이 절세 논리가 세대를 넘어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트럼프 계좌란 만 18세 미만 자녀 명의로 매년 최대 5,000달러를 납입할 수 있는 아동용 장기 저축 계좌입니다. 자녀가 18세가 되면 이 계좌를 로스 IRA(Roth IRA)로 전환할 수 있는데, 로스 IRA란 납입 시점에 세금을 낸 대신 이후 운용 수익과 인출 시 세금을 면제해 주는 방식의 계좌입니다.
구조 자체는 단순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매년 소액을 꾸준히 넣어두면, 18세 시점에는 상당한 원금이 쌓이고 이를 로스 IRA로 전환하는 순간부터 수십 년간 비과세로 자산이 불어납니다. 금융 칼럼니스트 브렛 아렌즈는 자녀가 18세 이후 이 자금을 당장 쓸 필요가 없는 가정이라면 충분히 납입할 가치가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눈여겨본 지점은, 이 제도가 '단기 자금 수요가 없는' 가정에게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여유 자금을 자녀 명의로 장기간 묶어둘 수 있는 가정일수록 복리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IRA의 FMV 허점이 '이미 자산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한 구조였다면, 트럼프 계좌는 '앞으로 자산을 물려줄 여력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한 구조라는 점에서, 결국 같은 문제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절세 제도의 설계가 누구를 상정하고 만들어졌는지와, 실제로 누가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지 사이에 계속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이 따라잡을 수 있을까 — RMD 법안의 한계와 한국 시사점
미 정치권도 이 문제를 손 놓고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론 와이든 상원의원과 리처드 닐 하원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은 퇴직계좌 잔액이 1,000만 달러를 초과하면 나이와 관계없이 매년 일정 금액을 의무적으로 인출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출처: U.S. Senate Finance Committee). 이를 의무 최소 인출(RMD, Required Minimum Distribution) 규정이라고 하는데, 세제 혜택 계좌에 자산이 무한정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정 연령 이후 매년 최소한의 금액을 인출하도록 강제하는 장치입니다.
다만 제가 이 법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느낀 한계는 명확합니다. RMD 강화는 '계좌에 얼마나 오래 자산을 쌓아둘 수 있느냐'를 제한할 뿐, 애초에 FMV를 낮게 산정해 편입하는 행위 자체를 막지는 못합니다. 비상장 자산의 FMV 산정 기준을 강화하거나 편입 가능한 자산 종류를 제한하는 근본적인 규제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번 법안은 절반의 해법에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의 ISA와 IRP 제도는 어떨까요. 다행히 편입 가능한 자산 종류가 법령으로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서, 비상장 주식을 직접 담아 FMV 저평가 전략을 쓰는 것은 현재로선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사례를 통해 진짜 배운 건, 규제의 형태가 다를 뿐 '비과세 혜택의 설계 방식이 자산 규모와 접근 가능한 자산의 종류에 따라 수혜 폭이 달라진다'는 근본적인 특성은 어느 제도에나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국내에서도 연금계좌의 편입 자산 범위를 넓히자는 논의가 나올 때마다, 이번 미국 사례를 기준점으로 삼아 누구에게 유리한 확장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FMV를 낮게 산정하는 게 왜 불법이 아닌가요?
A. 비상장 자산은 시장에서 실시간 거래 가격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평가 시점의 여러 방법론 중 하나를 선택해 적정 가치를 산정하는 과정 자체가 합법적인 절차입니다. 다만 그 평가가 지나치게 보수적(낮게)으로 이루어질 경우 결과적으로 절세 폭이 커지는데, 이는 평가 방법의 재량 범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현행법상 위법으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Q. 트럼프 계좌는 기존 IRA와 뭐가 다른가요?
A. 트럼프 계좌는 성인이 아닌 만 18세 미만 자녀 명의로 개설하는 계좌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18세까지는 매년 최대 5,000달러 한도로 납입하다가, 이후 로스 IRA로 전환해 성인용 비과세 계좌로 이어가는 구조입니다. 사실상 은퇴 자금이 아니라 '출생부터 시작하는 장기 자산 형성 계좌'에 가깝습니다.
Q. RMD 규정이 강화되면 초부유층의 절세 전략이 사라지나요?
A.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RMD는 계좌에 자산을 무한정 쌓아두는 것을 막는 장치일 뿐, 비상장 주식을 낮은 FMV로 편입하는 초기 전략 자체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입 자산 종류를 제한하거나 FMV 산정 기준을 별도로 강화하는 입법이 병행되지 않으면 절반의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Q. 한국 ISA·IRP는 지금 당장 안전한가요?
A. 현재는 편입 가능한 자산이 상장 ETF와 일부 펀드 등으로 제한되어 있어, 미국식 FMV 저평가 전략이 통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편입 자산 확대 논의가 향후 나올 수 있는 만큼, 어떤 자산까지 허용할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때 이번 미국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내린 결론
이번에 IRA 사례를 다시 파고들면서 제가 얻은 결론은, 문제의 본질이 '얼마나 부자냐'가 아니라 '어떤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느냐'라는 점이었습니다. FMV 산정의 재량, 트럼프 계좌의 장기 설계, 그리고 RMD 법안의 한계는 각각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같은 결론으로 수렴합니다. 비과세 제도는 접근 가능한 자산의 폭이 넓을수록, 그리고 자금을 묶어둘 수 있는 여유가 클수록 유리하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ISA·IRP는 아직 이런 구조적 허점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지만, 언젠가 편입 자산 확대 논의가 나올 때 이 사례를 기준으로 삼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과세 계좌를 운용하는 입장에서, 제도의 허점은 늘 가장 정교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 쪽으로 혜택이 쏠린다는 사실을 이번에 다시 새겼습니다.
※ 본 글은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세무·법률 자문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실제 세금 관련 결정은 반드시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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