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동료가 IRP로 작년에 연봉만큼 벌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이 501조 원을 넘어섰고 연간 수익률도 6.47%로 제도 도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그 과실이 모든 가입자에게 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DB형에 묶인 적립금만 228조 9000억 원. 저도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잔치는 벌어졌는데, 저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퇴직연금은 "노후를 위해 회사가 알아서 쌓아주는 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도 유형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걸 직접 겪으면서 알게 됐습니다.
확정급여형(DB)은 회사가 운용을 책임지고 퇴직 시 사전에 약정된 급여를 지급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DB란 'Defined Benefit'의 약자로, 말 그대로 지급받을 금액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안정성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코스피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장세에서도 그 상승분이 제 통장에 반영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 확정기여형(DC)은 'Defined Contribution', 즉 납입액이 정해지고 운용 결과에 따라 수령액이 달라지는 구조입니다. 지난해 DC형의 연간 수익률은 8.47%, 개인형퇴직연금(IRP)은 9.44%를 기록했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같은 해 DB형 수익률은 3.53%에 그쳤습니다. 같은 이름의 퇴직연금인데 격차가 이렇게 벌어진다는 것, 처음 봤을 땐 저도 의아했습니다.
더 씁쓸한 건 가입자 절반이 수익률 2%대에 머물고 있다는 점입니다. 상위 10%의 적극적인 운용이 평균 수익률을 끌어올려 놓은 것이고, 실제 다수는 정기예금 금리 수준의 수익조차 제대로 못 챙기고 있는 셈입니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500조 원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반가운 소식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미국 연금 백만장자가 부럽다면, 구조부터 봐야 합니다
피델리티 발표에 따르면 미국의 DC형 퇴직연금인 401K를 통해 100만 달러(약 15억 원) 이상의 연금자산을 쌓은 가입자가 지난해 말 기준 66만 5000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출처: Fidelity Investments). IRA 등 다른 은퇴계좌까지 합산하면 연금 백만장자는 20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합니다.
여기서 IRA란 'Individual Retirement Account', 즉 개인이 자발적으로 운용하는 은퇴 저축 계좌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IRP와 성격이 유사하지만, 자산 배분의 자유도와 세제 혜택 구조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수치를 처음 접했을 때 든 생각은 "역시 미국 증시니까 가능하지"였습니다. 그런데 살펴볼수록 단순히 주가 상승 덕분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수천만 명의 미국인이 매달 401K에 적립한 자금이 자본시장으로 흘러들어가고, 기업 성장의 과실이 다시 가입자에게 돌아오는 선순환 구조가 수십 년에 걸쳐 자리를 잡은 겁니다. 이것이 흔히 '연금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구조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의 45.7%가 아직도 DB형에 묶여 있습니다. 가입자가 운용에 개입할 수 없는 자금이 그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아무리 시장이 좋아도 내 연금이 움직인다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결국 연금 백만장자와 우리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수익률이 아니라 선택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401K: 미국 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직접 자산을 운용하며 수익률에 따라 수령액이 결정됨
- IRA: 개인형 은퇴계좌, 다양한 금융상품에 자유롭게 투자 가능한 미국의 보완형 연금 계좌
- 한국 IRP: 개인형퇴직연금, 지난해 수익률 9.44%로 퇴직연금 유형 중 가장 높았으나 활용도는 여전히 낮음
-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가입자가 별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때 미리 정해진 포트폴리오로 자동 운용되는 제도
DC형으로 옮기면 다 해결될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DC형 전환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반가운 건 사실입니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현재 증가 속도를 유지하면 조만간 1000조 원을 넘어서고, 15년 후에는 국민연금 기금 규모를 웃돌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더는 방치할 수 없는 규모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정부가 퇴직연금 의무화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금형 퇴직연금이란 전문 운용기관이 다수 사업장의 자산을 통합 관리하는 방식으로,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보다 규모의 경제를 기대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DC형 전환 자체는 방향이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직접 IRP를 운용해봤는데,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ETF를 고르고 리밸런싱 시점을 판단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금융 이해도가 부족한 상태에서 자율 운용을 맡으면 시장 변동성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습니다. DC형으로 전환하면 고수익이 따라온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전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의 내실화가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사전지정운용제도란 가입자가 별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미리 설계된 포트폴리오로 자동 운용되는 제도입니다. 운용에 무관심한 가입자들이 기본적인 수익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전망 역할을 합니다. 선택권 확대와 함께 이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고, 가입자가 합리적인 자산 배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금융 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퇴직연금 수익률이 국민연금 수준(지난해 19.9%)에만 근접해도 소득대체율 43%에 불과한 국민연금을 보완하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제도를 키우는 것만큼, 가입자가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지금 더 필요한 일로 보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DB형에서 DC형으로 전환하면 수익률이 무조건 올라가나요?
A. 일반적으로 DC형이 DB형보다 수익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가입자의 운용 역량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지난해 DC형 평균 수익률은 8.47%였지만, 가입자 절반은 2%대에 머물렀습니다. 전환 자체보다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Q. IRP와 DC형 퇴직연금은 어떻게 다른가요?
A. DC형은 회사가 납입하는 퇴직연금 제도이고, IRP는 개인이 추가로 가입하거나 퇴직 시 수령한 퇴직금을 이전받아 운용하는 개인형 계좌입니다. 둘 다 가입자가 직접 운용 지시를 내리는 구조라는 점은 같지만, IRP는 세액공제 혜택도 함께 받을 수 있어 노후 준비 수단으로 병행 활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Q. 디폴트옵션이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요?
A.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은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때 자동으로 적용되는 기본 포트폴리오입니다. 전혀 개입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운용이 되도록 설계된 안전망이지만, 현재 국내 디폴트옵션 상품의 수익률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본 설정에 의존하기보다 주기적으로 내 운용 현황을 확인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Q. 미국 401K처럼 한국 퇴직연금도 주식 100%로 운용할 수 있나요?
A. 현재 한국의 DC형·IRP에서는 위험자산(주식형 펀드, ETF 등) 편입 비율이 최대 70%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반면 401K는 원칙적으로 주식 100% 운용이 가능한 구조라 장기 수익률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규제 완화 논의는 진행 중이나, 아직 제도 변경이 이뤄지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제가 내린 결론
퇴직연금 500조 원 시대라는 숫자는 분명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들여다본 현실은 그 숫자만큼 밝지 않았습니다. DB형에 묶인 자금, 2%대 수익률에 갇힌 가입자 절반, 그리고 선택권 없이 그저 기다려야 하는 구조. 이 문제는 제도 개편만으로 단번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미국의 연금 백만장자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본인의 퇴직연금 유형이 DB형인지 DC형인지 확인하고, DC형이나 IRP를 운용 중이라면 현재 포트폴리오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이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제도가 바뀌기를 기다리기 전에 지금 내 손에 있는 선택지를 제대로 쓰는 것, 그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